안성집 뜨락에 모란 작약이 피고, 팔뚝에 떨어지는 햇빛이 촛농보다 더 뜨겁다. 저수지 푸른 물은 늠실늠실하고, 뽕나무의 뽕잎들은 기름 바른 듯 반드르르 윤기가 도는데, 종일 먼 산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한가롭다.
매운 추위에 눌린 온갖 꽃나무의 꽃망울들이 만개할 때 이규보의 `춘망부(春望賦)`를 읽으며 봄 정취를 맘껏 누리려던 게 엊그젠데, 햇볕은 따갑고 양(陽)의 기운은 천지간에 난만(爛漫)하다.
더딘 걸음으로 왔던 봄이 모란 작약꽃들이 지는 것을 끝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한 시인은 모란꽃 뚝뚝 지면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기리라고 했는데, 지금은 봄을 전별하기 좋은 때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자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남도 시인은 모란 작약 진 뒤 삶의 보람을 잃어 한 해가 하냥 섭섭하다 했지만, 전원에 묻혀 사는 이의 소박한 보람과 가느다란 기쁨마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청산은 봄비 몇 차례 뒤 더 푸르러지고, 텃밭의 채소들은 파릇하게 올라와 무럭무럭 자란다. 어제는 서운산을 다녀오고 오늘은 미리내 성지를 돌아보고 왔다. 오후 느지막까지 자잘한 근심들을 덜어내고 짐짓 한가롭게 책을 읽었다.
눈이 시리도록 어여쁜 신록의 자연 속에서 고요한 가운데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리석음 많은 자의 메마른 가슴은 벅차고 마음에는 없던 기쁨과 보람이 차오른다. 사람은 누더기 옷을 입어 보아야 가죽 옷의 아름다움을 알고, 바쁘게 지낸 다음에야 한가로움의 감미로움을 비로소 아는 존재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이 화창한 봄날 나는 마냥 화창하지 못했다. 연일 터지는 사건들로 심기가 불편했다.
한 유명인이 제 개인전 그림을 무명화가에게 맡겼다가 들통나자 `관행`이라고 항변한다. 무명화가에게 10만원씩 하도급을 줘서 얻은 그림에 제 사인을 넣어 기백만 원씩 판 것이 우리를 맥빠지게 한다. 노래와 그림을 두루 잘 한다고 인격마저 말끔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저택에서 남부러움 없이 살았건만 돈이든 명예든 더 갖고 더 누리려는 탐욕과 부주의함 때문에 그는 실수했다.
동거인을 죽여 안산 시화호 일대에 유기한 조 모씨는 인상이 멀쩡했다. 멀끔한 30세 청년은 저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동거인을 살해하고 그 사체를 토막내 버렸다.
강남역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여자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여성 일반에 앙심을 품은 가해자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묻지마 살인사건`이다. 가해자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우연만으로 피해 여성은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절박한 생존 경쟁에 내몰릴 때 인간은 제 안에 악마성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도덕과 윤리라는 껍질을 벗은 벌거벗은 인간은 야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인간은 남들을 희생시켜 가며 제 어리석은 욕구를 채우고, 남들의 노동을 대가 없이 착취한다.
또한 힘없는 타자를 성적으로 유린하며, 남들이 애써 모은 재화를 부당한 방식으로 빼앗아 제 부를 쌓는다. 그들은 뻔뻔한 악행을 저지르고도 도무지 제 행위의 부끄러움을 모른다. 어쩌다가 현실이 이토록 각박하고 살벌해졌는가?
누군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으랴만 절제 없는 탐욕과 넘치는 이기주의는 필경 자신을 타락과 나락으로 구르게 하니, 나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자. 동양의 한 현자는 말한다. 누가 없음으로 머리를 삼고, 삶으로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 꽁무니를 삼을 수 있을까? 누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하면 된다`고 성취지향 일변도로 살지 말고,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한 분별심을 갖자.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 밖에서 노니는 듯 느리고 소박하게 살자. 조금 더 단순하게, 조금 더 작게 살자
출처:매일경제160520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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