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남산 계단과 마주쳤다. 가파른 그 계단을 볼 때마다, 꼭 가위바위보가 떠올랐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 계단 앞에 서면 반드시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마지막 장면도, 김지운 감독의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도 그랬다.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주인공은 소개팅에 나온 여자가 너무 자기 스타일이라 끝없이 무리수를 둔다. 어느 정도냐 하면, 미니스커트에 10㎝ 넘는 하이힐을 신은 여자에게 남산에 동물원이 있는데 거기까지 걸어가 보지 않겠냐고 제안할 정도다.
"저는 결혼하면 여자 친구랑 산책 많이 할 거예요."
결혼하면 부인이랑 산책해야지 여자 친구와 한다고? 그게 불륜이지 뭔가. 사람들에게 '시추'하단(시크겠지!) 얘길 많이 들었다는 남자는 소개팅 여자와 길을 걷다가 마주친 남산 계단 앞에 서자 갑자기 승부욕을 발산한다. 남자가 말하길, 가위로 이기면 10계단, 주먹으로 이기면 20계단을 오르자고 한다(그 반대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여자는 남자가 너무 싫은 나머지 일부러 가위바위보를 져주고, 10계단, 20계단 멀어져 가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줄행랑을 친다.
이 남자, 상습적인 소개팅 실연남이다. 여자 앞에만 서면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을 너무 드러내는 게 문제다. 웃을 때 '하하하'가 아니라 '으헤헤헤'라고 웃을 것 같은 남자고, 실제 이 남자를 연기한 윤계상은 참 주책스럽게도 웃는다. 그런데 남산 계단에 앉아 망연자실 사라진 소개팅녀를 생각하던 남자 앞에 웬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갈 곳 없는 그 개를 바라보며 동병상련을 느낀 남자는 개를 끌어안고 집으로 가다가, 전봇대 위에 붙은 전단지를 발견한다.
'개를 찾습니다!'
이 남자, 개 주인을 만나러 그녀의 집 앞까지 왔다. 한눈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홀딱 반해 버린다. 남자의 아버지는 사내란 모름지기 자기 여자이다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꼭 한 번은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게 가위바위보였다. 엄마도 그렇게 꼬셨고, 김 여사도 그렇게 꼬셨다고 아들에게 웃으며 속삭였던 아빠였다(아빠는 엄마랑 이혼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여자. 여자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집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돈 봉투를 내민다. 남자는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한다. 남자는 해파리 같다. 속이 너무 빤히 보이니까.
"저랑 가위바위보 하실래요? 제가 이기면 같이 저녁 먹어요. 제가 지거나 비기면 그걸로 끝!"
여자가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손해 볼 것 없지 않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개도 찾아줬는데 모른 척하면 그거, 너무한 거 아닌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가위바위보 직전, 여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가위를 낼 겁니다! 꼭 낼 거예요."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이 순간이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이길지, 질지를 미리 알게 된 것이다. 선택권은 오롯이 여자에게 넘어왔다. 여자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바뀐다. "이 남자 뭐지?" 벚꽃비 내리는 밤 풍경 안에 서 있는 남자와 여자에겐 사랑의 예감이 가득하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맘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남산 계단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위바위보를 할 거다. 이기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할 거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전 주먹 낼 거예요! 꼭 낼 거예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사랑의 가위바위보'인지 알겠다. 근래 내가 본 가장 사랑스런 연애 팁 같았다. 이때, 벚꽃비 내리는 남산 계단은 옵션이 아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봄날처럼.
출처 : 매일경제 백영옥의 패스포트 (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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