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에선 귀족들이 장서(藏書) 경쟁을 벌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대륙에서 귀한 책이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귀족들은 서재를 꾸미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의 할리 백작은 책 5만권과 귀중한 필사본 4000권, 인쇄물 4만1000부를 미친 듯 모았다. 그는 결국 파산했고 그 충격으로 세상을 뜨자 아내가 필사본을 헐값에 내놓았다. 영국 정부가 이 책들을 시세보다 싼 1만 파운드에 사들인 덕분에 대영도서관을 세울 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작가 보르헤스는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고, 책은 기억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책벌레인 그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멀자 "신이 내게 책과 어둠을 동시에 준 것은 아이러니"라며 받아들였다. 눈이 먼 후 그는 열여섯 살 망구엘을 책 읽어주는 소년으로 고용했다. 망구엘은 어른이 된 뒤 책벌레들을 다룬 책 '독서의 역사'를 냈다.
▶소설가이자 기호학자 에코는 서재 두 곳에 책 5만권을 나눠 쌓아놓곤 백과사전에 맞먹는 지식으로 글을 써 왔다. 그는 "서재에 온 사람들이 이 책을 다 읽었느냐고 물으면 짜증이 난다"고 했다. 그는 두 가지 거짓말로 답한다. "벌써 읽은 책 이만큼은 대학교에 놔뒀고, 이건 새로 읽을 책이오"라거나 "한 권도 안 읽었소. 다 읽은 책이면 왜 지니고 있겠소"라며 놀린다.
▶조선일보가 국내 대형 서점 네 곳과 함께 조사했더니 한 달에 평균 10만원어치 넘게 책을 사는 사람이 11만8730명으로 나왔다. 이렇게 한 해 책값 '120만원 클럽'에 든 독자 평균 나이는 38.5세였다. 여든여덟 살로 가장 나이가 많은 권이혁 전 보사부 장관은 "한평생 책을 모았지만 서재가 없다"고 했다. 책 7000권을 대학에 기증한 뒤에도 책을 사서 읽고 손자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
▶지난해 직장인들은 한 달 술값으로 12만원, 책값으론 3만원을 썼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사람 사귀는 게 책 읽기보다 더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세태 탓이다. 한 인터넷 서점에선 최근 석 달 사이 10만~30만원씩 책을 산 고객을 3등급으로 나눠 할인 혜택을 준다. '120만원 클럽'에게도 특별 혜택을 줄 만하다. 한 해 120만원을 책 구입에 투자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내용 없는 책, 번역이 엉망인 책을 공연히 사 읽었구나' 하고 혀를 찼을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출처 : 조선일보 만물상에서 (11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