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은 인간 행동의 강력한 동기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것은 모두 쾌락을 좇는 과정이다. 이 쾌락은 인류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사람은 본래 단맛을 좋아하고 쓴맛을 싫어한다. 단맛을 내는 음식은 훌륭한 칼로리 공급원이지만 쓴맛은 독이 들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쾌락은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선혈이 낭자한 혐오스러운 장면을 보기 위해 돈을 내고 극장 앞에 줄을 서는 것이나 교통사고 현장을 자세히 보기 위해 차의 속도를 줄이는 것, 입안이 얼얼해지도록 매운 음식을 입안
에 털어넣는 행동도 과연 쾌락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똑같은 와인에 상표만 다르게 붙여놓았음에도 와인 전문가 대부분이 최고급 와인 상표가 붙은 쪽의 맛을 높이 평가한 실험도 있었다. 와인이 주는 `맛`이라는 감각은 똑같았음에도 느끼는 쾌락의 크기는 달랐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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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쾌락이 단순한 `감각`을 넘어 심오한 본질이나 본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짝퉁` 대신 진짜 `명품`을 원하고,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 중에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한 쪽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책은 한 예로 북미 페리에 설립자이자 대표이사인 브루스 네빈스의 사례를 다룬다. 그는 페리에 생수가 얼마나 맛있는지 홍보하기 위해 라디오 생방송에서 물이 든 컵 7잔 가운데 페리에 생수를 골라내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시연했다. 그러나 그는 다섯 번이나 시도한 끝에야 겨우 페리에를 골라낼 수 있었다.
저자는 블라인드 테스트에 실패했다고해서 네빈스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블라인드 테스트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페리에 생수가 맛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만 그 좋은 물맛을 음미하려면 그 물이 페리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뿐이다.
"(쾌락은) 감각기관으로 지각하는 세계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에서 얻는 즐거움은 우리가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 그림을 감상할 때는 화가가 누구인지가 중요하고, 이야기를 읽을 때는 진실인지 허구인지가 중요하며,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어떤 동물의 고기인지가 중요하고, 성관계를 맺을 때는 상대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2007년 1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워싱턴 지하철역에서 행한 실험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얄팍한 속물근성 그 이상의 것을 읽어낸다. 조슈아 벨은 1713년에 제작된 350만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들고 43분 동안 연주했지만,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에 모인 돈은 고작 32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비싼 티켓값을 치르고 공연장을 찾지만 허름한 옷을 입고 지하철역에서 연주하는 그에게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예술을 감상할 때 연주 자체뿐 아니라 `맥락`에도 가치를 매기기 때문이다.
쾌락의 `본질주의`를 이해하면 유명인들이 입었던 옷이나 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 비싼 값에 거래되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한 경매 사이트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먹다 만 아침식사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씹던 풍선껌이 올라온 적도 있다. 물론 이런 물건들을 사는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 되팔거나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언급한 "한 번 연결되면 나중에 서로 떨어져 있어도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 신앙에서 답을 찾는다. 유명인과 접촉했던 물건에는 그 사람의 본질이 흡수돼 있고, 그 물건을 통해 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는 `본질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해 음식, 예술, 이야기 등이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이유를 하나씩 살펴나간다. 쾌락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제시한 것도 독특하지만 책에 실린 다양한 사례와 실험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출처 : 매일경제신문 ( 정아영 기자 )
'체취'가 핵심인 특정인의 소장품, 눈 가리고 마시면 그게 그거인 와인… 우리가 평가하는 사물의 가치는 '본질주의'에 있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폴 블룸 지음|문희경 옮김|살림|358쪽|1만 6000원
2007년 워싱턴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43분간 클래식 음악 여섯 곡을 연주하는 동안 1000여명이 그 앞을 지났고, 남자가 벌어들인 돈은 32달러 남짓이었다. 이 남자는 세계적 명성을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었고, 들고 있던 바이올린은 350만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였다.
다른 실험 하나 더. 저자는 피실험자들을 모아 놓고 '존경하는 인물을 떠올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오바마, 조지 클루니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 그들이 입었던 스웨터를 산다면 얼마나 돈을 낼 것인지 물었다. 피실험자들은 상당한 돈을 내겠다고 했다. 다시 '스웨터를 되팔거나 남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가격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인물이 입긴 했으되 깨끗이 세탁한 것이라면'이라 물었다. 처음 값의 3분의 1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반응할까? 예일대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신간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원제:How Pleasure Works)에서 인간 행동 속에 숨어있는 쾌락 추구의 심리를 파헤친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심리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의 키워드는 '본질주의'다. 저자가 말하는 본질이란 '맥락' '스토리' '경험' 등이 녹아있는 개념이다.
앞에 예로 든 바이올리니스트나 스웨터 실험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 역시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바이올리니스트는 정식 공연장에서 연주해야, 존경하는 인물의 스웨터는 그 사람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체취'가 중요하다 믿는 것은 특정인이 소유했던 물건과 접촉했을 때 그 사람의 본질이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일종의 '전염'(contagion)심리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케네디 대통령이 썼던 골프채는 1996년 경매에서 77만2500달러, 케네디 집에서 썼던 줄자는 4만8875달러에 팔렸다.
음식, 섹스, 물건에 대한 집착, 미술을 비롯한 예술, 상상의 쾌락, 과학과 종교까지 인간이 추구하고 몰입하는 쾌락에 대해 진화심리학과 철학 등 다양한 잣대를 들이대 흥미롭게 분석했다. 가령, 여러 차례 실험에서 밝혀졌듯 생수와 수돗물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구별해내지 못한다. 심지어 유명 생수회사의 CEO도 자사 제품을 구별해내지 못했다. 와인 전문가들까지도 최고급과 보통을 구별 못하는가 하면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명 미술관에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내 평범한 카페에 걸어놓으면 보통 사람들은 "유명 화가 그림과 닮았네"라고 반응한다. 발정기의 칠면조 수컷은 모형으로 만든 암컷의 머리만 보고도 흥분하지만 사람은 배우자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를 보더라도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
'본질주의'는 음식에 있어서도 발현된다. 마하트마 간디는 어느 날 염소 고기를 먹은 후 뱃속에서 염소의 영혼이 울부짖는 것 같다고 느낀 후 채식주의자가 됐다. 음식에 그 동물의 본질인 영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력식품을 밝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경향의 극단적 경우는 인육(人肉)을 먹는 행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 쾌락을 얻는 유일한 동물이다. 미국인들은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가만히 앉아서 상상의 세계에 빠지려 한다. 어린 아이들조차도 누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애쓴다.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판타지 소설·영화와 TV에 넘쳐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을 보라. 실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안전하게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풍부한 사례 연구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도 제시한다. 사례들도 재미있고 읽다 보면 "맞아" 하며 무릎을 칠 때도 많다. 하지만 많은 사례가 '본질주의' 하나로만 치닫는 서술방식은 지나친 단순화의 느낌도 든다.
출처 :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