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샷(Loonshot). 제안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다들 무시하는 프로젝트를 말한다. 다른 뜻도 있다. 전쟁, 의학, 비즈니스의 판을 바꾼 아이디어의 뜻도 있다. 동전의 앞뒤처럼 실패의 반대는 성공임을 알려주는 단어인 셈이다.
물리학과 비즈니스, 역사를 능수능란하게 결합해 위대한 기업들이 `룬샷`을 통해 혁신을 이룬 비결을 밝혀내는 책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 포브스와 뉴스위크 등에서 `올해의 책`을 싹쓸이한 화제작이다. 저자 사피 바칼은 외계인급의 `스펙`을 자랑한다. 13세부터 프린스턴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하버드대 최우등 졸업 후,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2001년 암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테크 기업 신타제약을 설립하고 10여 년간 최고경영자로 일하기 전까지 그는 이론물리학자였다.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흐름출판
이 책은 팀이나 기업, 심지어 국가가 극적 변화를 겪는 이유를 `상전이`(복잡계의 갑작스러운 변화)라는 과학적 원리로 해석해낸다. 그는 조직의 `문화`보다는 `구조`의 작은 변화가 대단한 발전을 이끌 수 있으며 `혁신`보다 `설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0도의 경계에서 물이 얼음으로 얼음이 물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처럼 창의성과 효율성의 동적 균형을 이룬 조직은, 창조적 해결책을 도출해 위기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잘나가던 기업이 갑작스레 몰락하는 데는 패턴이 있다. 룬샷을 차버리는 실수를 저질러서다. 창업가들은 대기업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가 그들이 보수적이며 리스크 회피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열정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대기업형 사람을 스타트업에 넣는다면 과격한 아이디어를 옹호하는 혁신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많으면 달라진다`는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2000년대 초반 지구상 휴대폰의 절반을 팔아치우던 노키아는 혁신의 대명사였다. 노키아의 CEO는 위계서열이 없고 실수를 해도 용납되는 조직 문화가 성공의 열쇠라고 설명했다. 2004년 신이 난 노키아 엔지니어 몇 명은 완전히 새로운 전화기를 만들었다. 인터넷이 가능하고 컬러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전화기였다. 미친 아이디어가 하나 더 있었다. 온라인 앱스토어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두 아이디어를 깜깜히 묻어버렸다. 3년 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의 미친 아이디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구체화되는 걸 목격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한 것이다. 잡스는 개발자와 관리조직 사이의 소통을 책임지고 아이디어의 이전과 교환을 장려하는 정원사 역할에 집중해 비난과 실패를 이겨내고 혁신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난 뒤 12년 만에 돌아온 잡스는 조니 아이브와 같은 예술가와 팀 쿡 같은 병사를 똑같이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상태였다.
룬샷에 관한 첫 번째 교훈은 2차 세계대전에서 배울 수 있다. 1939년까지만 해도 연합군은 군사기술에서 독일군에 한참 뒤처져 있었다. 독일의 신형 잠수함 U보트는 대서양을 누볐고, 독일의 두 과학자가 핵분열을 발견하며 핵무기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다. 1940년 MIT 학장이었던 버니바 부시는 워싱턴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과학연구개발국을 설립했다. 부시는 군인들과 과학자 사이의 반목을 깨고, 전쟁에 기술을 도입하는 일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부시는 상전이의 원리를 조직에 대입했다. 격리된 공간에서 연구를 보장해 과학자의 창의성을 최대한 보장하되(상분리), 병사들이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분리하되 소통하는`(동적평형) 조직을 설계했다.
그 덕분에 독일의 영국 포위작전을 끝낸 기술이 바로 20년 전 아마추어 무선통신 애호가가 발견했지만 묻혀 있던 레이더 기술이었다. 미국 해안에서만 400여 척의 배를 침몰시킨 U보트는 레이더를 장착한 폭격기가 대서양을 정찰하자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부시의 조직은 엄청난 속도로 룬샷을 키워냈다. 레이더뿐 아니라 페니실린, 말라리아, 파상풍을 연구했고, 핵폭탄을 완성시켰다.
저자는 `군중의 지혜`는 왜 `군중의 폭정`이 되는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모든 상전이는 경쟁하는 두 힘의 격돌이다. 각각 판돈과 지위라는 두 인센티브가 양쪽에서 줄을 당긴다고 가정해보자. 작은 바이오테크 회사에서 신약이 성공하면 모두가 백만장자가 된다. 이 판돈에 비하면 지위의 특전은 미미하다. 반면 대기업에서는 사업이 성공해도 판돈은 줄어드는 반면 지위의 특전은 커진다. 조직이 커질수록 같은 사람들이 모였더라도 룬샷을 퇴짜 놓을 확률이 커진다. 저자는 사내 정치의 효과를 줄이고, 동료들의 인정 같은 영향력이 큰 비금전적 보상을 활용하는 등으로 매직넘버(룬샷이 가능한 조직원의 수)를 높이라고 제안한다.
세계대전부터 팬암, 폴라로이드, 애플, 007과 스타워즈의 성공 비결까지 역사의 현장을 내달리며 과학자의 눈으로 `룬샷`은 비밀을 알려주는 비범한 책이다. 많은 기업이나 국가가 위기에 직면하면 창의성과 혁신을 사방에 심으려고 기를 쓴다. 결과는 흔히 혼돈만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 책은 세상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보다는 세심한 정원사가 변화시킬 수 있음을 논증한다.
출처: 매일경제 '200425[김슬기 기자]
'♣ 책을읽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꿀잠서 깬 장자의 질문 “내 몸에 붙은 그림자 떼는 법은?” (0) | 2020.11.25 |
---|---|
아프리카서 달까지…인류는 20만년째 여행중 (0) | 2020.05.03 |
"인생은 괴로운 것…집착 버려야 행복해져" (0) | 2020.04.13 |
전심전력` 화웨이, 지독했기에 위대해졌다 (0) | 2020.02.08 |
`천재` 테슬라를 이긴 에디슨…그에겐 `혁신자본`이 있었다 (0) | 2020.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