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읽고 ♣

경영대가의 마지막 조언은…`살아남는 법` 아닌 `살아가는 법`

달컴이 2019. 11. 21. 22:51





피터 드러커를 `경영관리이론의 대가`라 부르고, 필립 코틀러를 `마케팅의 아버지`라 소개하는 무례가 용서된다면, 찰스 핸디를 `경영철학의 조상`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찰스 핸디가 평생을 같이한 주제는 조직관리나 재무, 마케팅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다른 경영학자들과 달랐던 것은 역경, 극복, 재능, 학습 등 삶의 다양한 곱이곱이를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경영학은 생각하는 틀일 뿐이었다.

찰스 핸디(1932년생)는 고(故) 피터 드러커(1909년생)·필립 코틀러(1931년생) 등과 동시대인이다. 한때 피터 드러커가 세계 최고경영사상가 50인 중 1위를 차지할 때 2위를 기록했던 게 찰스 핸디다. 필립 코틀러, 톰 피터스 등과 함께 경영사상가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 있다.
이런 그가 올해 만 87세를 맞아 출간한 책이 `삶과 도전에 관한 21개의 편지(21 Letters on Life and its Challenges)`다. 편지의 수신인은 4명의 손주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남긴 글이라니, 특히 경영학자가 썼다니 내용은 읽어보나마나 뻔하지 않을까.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부끄러워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어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책 속엔 매몰찬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노(老)학자의 조언이 담긴 게 아니었다. 시간을 초월하는 법, 공간을 뛰어넘는 생각법이 들어 있었다.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이 서간문은 그냥 `4명의 손주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타닥타닥 땔나무가 보채는 뜨거운 벽난로 곁에서 찰스 할아버지가 손주 `레오·샘·네퓨·스칼렛`의 이름을 부르며 정성껏 눌러쓴 글이었다.
일단, 찰스 핸디에 대한 설명부터 하는 게 순서에 맞겠다. 한국에서는 웬만한 경영서적에 다들 한 번씩 인용되는 경영학자가 피터 드러커이지만,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출신 찰스 핸디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일랜드 킬데어의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난 찰스 핸디는 옥스퍼드대를 나와 다국적 석유회사 셸에 들어가 마케팅 임원까지 올라갔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MIT 슬론경영대학원 펠로를 거쳐 1967년부터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교수로 정착했다. 지금은 명문 비즈니스스쿨로 유명한 LBS에 경영전문 석사학위인 MBA 과정을 만든 게 그다. 30여 년간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포트폴리오 인생` `코끼리와 벼룩` `헝그리 정신` 등 명저를 쏟아냈고, 한국에도 많은 책이 번역됐다.

1990년대 영국에서 보낸 경험이 있다면 그의 이름보다 목소리를 더 쉽게 기억할지 모른다. 찰스 핸디는 당시 BBC라디오에서 매일 아침 `오늘의 사색(Thoughts for the Day)` 코너를 진행했는데, 중저음의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출근 준비를 하거나 학교갈 채비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술발전과 인구변화, 일터와 사회, 개인과 기업의 생존위기, 자유시장경제의 문제점 등 1시간이 주어진다해도 말하기 힘들 것 같은 고난도 주제들을 단 10분 만에 조곤조곤 얘기해주는 걸 들으면서 새삼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삶과 도전에 관한 21개의 편지`에 담긴 주제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TV나 냉동식품, 비디오테이프 등이 나오기 전에 태어난 1930년대생 할아버지가 보기에 인공지능(AI)이 바꿔놓을 미래는 어떨까. 과연 그때가 되면 우리 아이들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부모님 말씀이 항상 옳고, 두꺼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진리라 믿는 `확실성의 시대`를 살았는데, 지금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은 구글은커녕 서로의 SNS도 믿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 이런 시대에 진리란 무엇이며, 교육이 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걸까.
찰스 핸디의 전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쉬엄쉬엄 읽을 만하다. 생소한 경영학 용어는 없고 예이츠나 디킨스 같은 영국의 유명 시인, 소설가들이 자주 인용된다. 아무리 어려운 경영학 개념도 개인적 경험에 빗대어 설명하는 그의 스타일은 책 속에서도 여전하다.
가느다란 그의 펜끝을 따라가다 보면 가을날 찬서리에 풀이 죽은 정원 한쪽이 떠올라 괜히 고개를 수굿하게 된다. 책의 맨 마지막 장 `나의 마지막 말(My Last Words)`까지 읽으면 마치 이 세상을 떠나기 앞서 남긴 마지막 편지 같아서 더욱 그렇다. 사실 그는 이 책을 한창 작업하던 지난해 사랑하던 아내를 앞세웠다. 그러고보니 슬픔이 가슴에 쑥 들어올까봐 일부러 쿵쾅대며 바쁘게 편지를 써내린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말에서 그는 이런 조언을 남겼다. "일기를 쓰거라(Write a diary). 2세기 사람인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일기를 썼다. 그는 매일 자기가 한 일을 적지 않았다. 그가 그 일로부터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어떤 도전에 대해 준비해야 할지를 적었다. 할아버지도 일기를 썼는데, 일기란 게 일과 삶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해주더라. 황제에게도 통했다니 너희들에게도 통하지 않겠니."                             출처 : 매일경제'191121 (한예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