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동안 ♣

[세상 사는 이야기] 가보지 않은 길

달컴이 2017. 3. 11. 08:02





1979년 가을의 눈물

1. 어스름 골목길을 접어드는데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담벽을 따라 이어지는 침묵과 한숨. 초등학생인 내게 늘 "꼬마야"라며 장독대 너머로 누룽지를 넘겨주던 토깽이 아저씨(토끼를 키우던 옆집 아저씨 별칭이다) 눈자위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른들이 왜 울지? 1979년 가을이었다.

초선의 박근혜 의원



2. 19년 뒤 한나라당 부총재단 회의실. 국정원의 야당 사찰 논란이 일어난 일명 국회 529호실 처리 문제가 안건에 올랐다. 강제진입이냐 밤샘농성이냐를 놓고 언성이 높아지더니 고성까지 터진다. 급기야 누군가 회의장 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초선의 박근혜 의원이다. 돌아가신 그분의 딸이다. "저, 혹시 얘기가 잘 안 되셨나 보죠?" "그냥 놔줘보자는 거예요. 아니 왜 못 뜯어요?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결국 관철이 됐다.

"대전은요?" 선거의 여왕

3. 6년 뒤. 유력한 정치인으로 부상한 그는 패색이 짙던 총선을 극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커터칼 테러를 당하고 깨어난 뒤 던진 "대전은요" 한마디에 2006년 지자체 선거가 역전됐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 거절한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을 대권도전이 머지않았다고 여겨졌다.

대통령에 대한 소문

4. 부모를 흉탄에 보낸 장녀 박근혜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어른들이 적지 않았다. 돌봐줄 가족은 없고, `이제 국민이 가족`이라는 선거구호가 적중했다. 위에 기술한 1, 2, 3. 당시에도 박 대통령 곁에 최순실 씨가 있었으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취임 후 대통령이 장관들 대면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부처 국장급 인사까지 멈춰서고 인사 담당 비서도 모르는 공직 후보자가 발표되더니 예의 `낙마`로 이어졌다. 결국 최순실 사태. 세 번이나 대국민사과를 발표했지만 카메라 앞에 선 박 대통령은 국민들 눈에 억울해하는 듯 비쳤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를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 부른다. 국가 헌법에 의해 파면된 첫 번째 대통령이다.

리더가 사라진 대한민국

5. 리더십이 없는 적막강산,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 대통령이 물러난 폐허 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 상황, 주변국의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이 돌풍은 나라를 통째로 날릴 수도 있고, 아니면 용출하는 발전 동력으로 쓰임새 있게 활용될 수도 있다. 지략을 넘어선 책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구한말 이미 우리는 분명한 좌표 없는 국가운영이 어떤 참사를 내는지 목격하지 않았나.

구한말의 씁쓸한 기억

6. 당시 지식인들은 함정에 빠졌다. 19세기 말 열강의 틈새에서 조선의 생존을 고심했던 언필칭 엘리트라는 분들이 애독한 `조선책략`은 밀려드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중국을 강력한 우방으로 하고 연대의 고리에 일본과 미국을 넣는 일명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실은 러시아의 동진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인 중국의 책략이었다. 민비 시해 후 정신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야 했던 고종, 그리고 국가 간 세력균형이라는 도식적 대응에 매몰된 지식인들로 인해 결국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실패를 역사의 발전으로

7. 우리가 갈라지고 왜소해지면 나라는 비참해진다.

이제 과도 정부는 두 달 남은 임기가 아닌 새로 두 달 임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본다. 안보와 경제의 우선순위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키워 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 핵 문제가 해결되면 사드는 남한에 배치될 필요가 없다는 설득을 중국에 왜 못 할까. 생존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 대통령의 실패가 역사의 발전으로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국민과 정부에 달려 있다. 우려와 번뇌가 교차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출처 : 매일경제 170311 [김은혜 MBN 앵커·특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