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년 역사 독일 家電기업 밀레 마르쿠스 회장
보통 가전제품 수명은 10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밀레는 최소 20년은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 가격이 경쟁사보다 2~3배 비싸지만, 밀레 제품을 찾는 소비자는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강소기업 연구로 유명한 헤르만 지몬 지몬-쿠퍼앤드파트너스 회장은 "어머니가 밀레 세탁기를 무려 40년이나 썼다"면서, 뛰어난 품질을 밀레의 최대 강점으로 꼽았다.
밀레는 1899년 기술자였던 카를 밀레(Miele)와 사업가였던 라인하르트 칭칸(Zinkann)이 공동 설립한 가전 회사로, 독일의 대표적 강소기업으로 꼽힌다. 두 창업자는 처음부터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품질이 업계 최고인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의지를 담아 빨간색 회사 로고 밑에 'Immer Besser(언제나 더 좋은)'라는 글귀를 새겼다. '언제나 더 좋은 제품을 만들자'는 뜻이다. 이 모토에 함축된 장인 정신이 117년간 밀레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 지난달 방한한 마르쿠스 밀레(Markus Miele·47) 회장(기술 부문)을 서울 광화문 근처 숙소에서 만나 100년 넘게 유지해 온 프리미엄(고급) 전략에 대해 들었다.
밀레는 우리에게 비싼 가전제품을 만드는 기업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맞먹는 혁신 기업이다. 밀레 앞에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밀레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계식 버터 분리기는 독일 농가의 일손을 덜어줬다. 전기 모터가 달린 세탁기 개발은 유럽 여성들에게 자유를 줬다.
밀레는 1899년 독일 북서부 헤르츠브로크에 있는 작은 방앗간 건물에서 직원 11명으로 시작했다. 첫 제품은 우유에서 크림을 분리하는 버터 제조기였다. 엔지니어였던 밀레는 부인이 버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던 것을 보고 원형 손잡이를 돌려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사업은 잘 몰랐기에 친구 칭칸과 동업하는 형태로 회사를 세웠다.
밀레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전기 모터가 달린 세탁기를 출시하면서다. 이 세탁기는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세계 최초로 식기 세척기를 개발·출시하며 전 세계 45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 다른 브랜드보다 몇 배는 비싸지만, 프리미엄 이미지 덕분에 어느 나라에서나 높은 점유율을 보인다.
치명적이지 않아도 불량 발견하면 전량 리콜
―밀레가 생각하는 프리미엄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창업 초기부터 우리는 수명이 길고 고장이 적어 자주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 제품이 프리미엄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1900년대 초반 밀레의 주요 고객은 농부였다. 그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매장을 자주 방문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좋은 재료를 써서 튼튼한 밀레 제품을 선호했다. 이런 신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프리미엄 제품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나.
"프리미엄(고급) 제품은 럭셔리(사치) 제품과는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프리미엄 시장이 틈새시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프리미엄 제품은 튼튼해서 오래 쓸 수 있고, 디자인이 유행에 구애받지 않아 싫증 나지 않는 제품이다. 이런 제품을 원하는 고객층은 럭셔리 제품처럼 제한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서 밀레 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25%에 달한다. 우리가 사업을 하며 가장 뿌듯한 순간은 고객들로부터 '기존 밀레 세탁기를 20년 동안 쓰다가 이번에 새 밀레 세탁기를 샀다'는 손편지를 받을 때다. 밀레 제품의 재구매율은 96%에 이른다. 우리는 늘 시간을 초월해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
―항상 완벽한 제품을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맞다. 우리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15년 전 진공청소기를 출시했는데, 내부 스프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용하는 데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제품이었다. 결국 우리는 청소기 전량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가전제품 분야에서 리콜은 흔하지 않았다. (자동차 등과 달리)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도 아니었고, 수십만유로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회나 임직원 모두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해 빠른 리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후 5개월간의 추가 개발 기간을 거쳐 내부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을 재출시했다."
밀레는 회장이 둘이다. 기술 부문 마르쿠스 밀레 회장(왼쪽)과 경영 부문 라인하르크 칭칸 회장/밀레
―100년이 넘는 역사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1912년 세탁기 사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을 때다. 당시 자동차 산업은 성장 가능성이 컸지만,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자본 부족으로 사업 시작 2년 만에 143대만 팔고 자동차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때의 아픈 기억으로 지금도 당시 경쟁사였던 벤츠 자동차는 타지 않는다."
―자본이 부족하면 대출을 받아도 되지 않나.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은행 등 남의 돈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회사 정관에 적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경영진 모두 무차입 경영에 공감하고 있다. 그래야만 조직의 유기적 성장이 가능하고, 직원들도 예산이나 계획을 짤 때 회삿돈을 자기 돈처럼 소중하게 다룬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국가에서 프리미엄 가전제품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때 대출을 받아서라도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다 보면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직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외부 충원을 하다 보면 밀레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도 늘어나게 된다. 우린 조직과 직원이 함께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레에게 돈은 결코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밀레는 밀레 가문과 칭칸 가문이 4대가 넘게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기업사(史)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증조부는 1899년 회사를 창업할 때 사명을 '밀레앤컴퍼니'로 정했다. 동업자였던 칭칸과 관계가 깨지면 언제든 다른 파트너를 찾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두 경영자 모두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변치 않았기에 동업 관계가 유지됐다.
지금도 두 가문은 동시에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한 가문이 독단적으로 경영권을 휘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세대마다 기술 부문과 경영 부문 대표를 번갈아가며 맡는다. 현재 나는 기술 부문 대표를 맡고 있다. 두 가문은 형제간 다툼을 막기 위해 각각 3명의 대표자를 뽑아 가족위원회를 구성해 후계자 선출 등의 문제를 결정한다.
현재 지분 구조는 밀레 가문이 51%, 칭칸 가문이 49%다. 이 비율은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에도 유지된다. 남녀 구분은 없다. 두 가문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신규 투자 등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이사회는 두 가문 출신 2명과 외부인 3명으로 구성된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은 만장일치여야만 집행이 가능하다. 가족 기업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누구도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게 견제 장치를 둔 것이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만장일치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적절한가.
"외부인이 보면 결정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방법이 강력한 기업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경영진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경영진의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 토론의 끝에는 모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회장직을 맡게 됐나.
"난 어릴 적부터 가문의 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늘 '가문에서 나쁜 경영자를 배출하는 것보다 좋은 축구 선수 한 명 있는 편이 낫다'며 반대하셨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 스위스 장크트갈렌대에 진학하게 됐고,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경영에 참여해도 되는지 아버지께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때도 아버지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라'며 반대하셨다. 그래서 포기하고 독일 자동차 부품 회사 헬러에서 2년 정도 일하고 있었는데, 가문으로부터 경영 참여를 제안받은 것이다. 그분들이 제안했다는 건 가문 예선전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난 회사 측에 계약 조건을 제시하라고 했고, 조건이 나쁘지 않아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했다. 증조부가 만든 회사였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야 회사로 들어올 수 있었다(웃음)."
출처 : 조선닷컴 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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