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동안 ♣

동네마다 목욕탕이 있었다

달컴이 2016. 10. 15. 23:41

 

 

 

 

예전에는 동네마다 목욕탕들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딱 반세기 전 서울 세검정 아래 흐르는 하천에는 피라미들이 놀고, 백사실 계곡에는 가재들이 지천이며, 연립주택들로 빽빽한 부암동 언덕 일대가 다 능금밭이었다. 아버지는 늘 바빠서 어린 자식들 볼 겨를이 없고, 어머니의 눈빛이 맑았던 그 시절 동네 목욕탕은 안쪽에 신발장과 탈의실이 있고, 목욕실은 냉탕과 온탕으로 나뉜 욕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추석이나 설 전날 동네 목욕탕은 항상 만원이었다. 그 목욕탕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동네 목욕탕마다 장노년층 손님이 북적이던 시절은 다들 가난했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

한창 젊었던 시절, 어느 늦은 오후 한적한 시간에 목욕탕엘 갔다. 목욕탕 천장 바로 아래 창문으로 황금빛 햇살이 뻗쳐 들어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욕조의 물 위로 떨어진다. 온수에서 피어오른 수증기와 햇살이 희뿌옇게 엉킨 채 빛날 때 다리, 허리, 등, 가슴, 어깨, 목까지 욕조 물에 담그고 있으면 세포들이 낱낱이 해체되어 녹는 느낌이다.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하는 가운데 기분조차 몽롱해진다. 노인 두어 명이 욕조 속에서 눈을 감고 고요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쾌락이 몸의 말단으로 퍼져나갈 때 시공의 분별도 우주도 없어지고, 내 안의 가득 차 웅성거리던 근심과 번민들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 아, 평화롭군, 하는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찰나 가슴은 벅차오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속눈썹을 적셨다.

아무 때나 찾아가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홀딱 벗은 뒤 김이 오르는 욕조 속에 뛰어들던 동네 목욕탕들은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벌써 돌아가시고, 나는 장년기를 넘어 노인이 되는 초입에 서 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르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동네 목욕탕이 사라진 자리에 시설 과잉인 불가마 찜질방이나 국적 불명의 사우나들이 성업 중이다. 어쩌면 묵은 때를 불려 벗겨내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청정한 기쁨을 주던 그 많은 동네 목욕탕들은 현실에는 없었던 환상이고 무(無)가 아니었을까.

동네 목욕탕에 대한 애수에 잠긴 것은 일본 만화가인 구스미 마사유키의 산문집 `낮의 목욕탕과 술`을 읽은 탓이다. `목욕탕`과 `술`은 해방감과 쾌락의 원천이다. 목욕탕은 묵은 때를 벗겨낼 뿐만 아니라 `구원받고 재생하는 장소`인 것이다. 술은 언제 마셔도 달다. 이 못 말리는 애주가는 유쾌한 어조로 `목욕`과 `술`을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는데, 그 두 가지에 기대면 인생의 고달픔 따위는 곧 잊힌다는 것이다. 명랑과 긍정을 뒤섞은 문장들은 초긍정적인 관점으로 유쾌하고 술술 잘 읽힌다. 재미가 있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다른 한편으로 잃어버린 것들이 불러일으킨 멜랑콜리로 허탈한 웃음이 솟기도 한다. "현기증, 도취, 망아, 유열, 법열, 그러다 고요한 발광 가운데 황홀경 속에 눈을 까뒤집고 실신, 승천, 정면을 응시한 채 웃는 얼굴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목욕탕의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거의 종교적인 법열감에 빠져드는 이런 과장 섞인 문장조차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아, 나도 당장 목욕탕의 욕조에 뛰어들어 몸을 오래 담그고 싶다.

술은 낮술이다. 한낮의 목욕탕에서 땀을 흘리고 나왔으니, 햇살 아래 낮술 한 잔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친애하는 만화가이자 술꾼께서는 한낮, 목욕탕에 다녀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맥주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술꾼이라면 응당 목욕을 하고 난 뒤 차가운 황금빛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싶은 유혹에 기꺼이 빠지리라. 세포들이 맥주 한 모금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인생 만사가 흔쾌하게 용납되는 그 찰나 목구멍으로 넘기는 맥주 첫 모금이 어찌 맛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욕의 느긋한 기쁨과 더불어 술의 기적에 기대어 도취와 망아의 무릉도원을 잠시 거닐다 돌아오고 싶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시원하게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술 끊은 지 오래인데, 이런 문장을 읽으니 한 잔의 유혹에 그만 가슴이 설렌다.

                                                                                                                                출처 : 매일경제 장석주 시인 1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