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날짜 :'14년 9월 23일
지은 사람 : 김 훈
옮긴 사람 :
출판한 곳 : 문학동네
내용 중에 : 1590년 3월에 보낸 통신사 3명이 1591년 3월에 복명했다. 황윤길이 정사였고 김성일이 부사였고 허성은 서장관이었다. 복명
의 내용은 엇갈렸다 황윤길은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같은
대전쟁을 수행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 책 350쪽 내용에서 -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 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 - 난중잡록 -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 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 난중잡록 -
- 책 366쪽 내용에서 -
정유년(丁酉年) 1597년 이순신 나이 쉰셋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었다. 이순신을 체포하기 직전, 조정에서 벌어진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한산도의 장수는 평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
3월 13일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렸다. 비망기에서 임금이 이르기를, " 이순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
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이보다 앞서, 사헌부는 이순신 처리문제에 대해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다.
'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대 잡아
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
조정은 이순신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고문을 받고 4월 1일 출옥해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4월 13일, 백의종군 남행길에 모친상을 당했다. 이 무렵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남쪽 길이 바쁘다. 다만 부르짖으며 울었
다. 어서 죽기를 바랐다. - 1597년 4월 16일자 -
- 책 369쪽 내용에서 -
무술년 1598년 이순신 나이 쉰넷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2월 17일, 고금도로 수군 진영을 옮겼다. 철수하는 적의 주력 쪽
으로 바싹 다가가려는 이동이었다. 7월 16일,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 5백여 척이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11월 19일,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
고 50여척이 도주했다.
- 책 371쪽 내용에서 -
12척만으로 330척 敵船에 맞서는 비극 없게 막는 게 진정한 리더십
敵과 我軍 사이에 낀 실존적 고독 다룬 책이 10년 넘게 인기 끈 건
집단 협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생존의 고독이 더 심화됐다는 것
-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칼의 노래'가 70만부를 돌파하던 2005년 무렵 작가 김훈을 만났더니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정쟁을 일삼던 여야 정치인들이 이구동성으로 '12척 정신'을 내세울 때였다. 당시 참여정부의 정책기획위원장이 12개 국정과제위원회를 세우면서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에 비유하기도 했다. 김훈은 "이순신의 리더십을 현대사회에 도입한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무찔렀지만, 그것을 현대사회의 리더십 표본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몽매의 소치다. 적(敵)이 330척의 배로 쳐들어올 때 우리에게 12척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대의 진정한 리더십이다. 12척으로 경제난을 타개하겠다고 하는 뜻은 가상하지만 국민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칼의 노래'는 성웅 이순신의 전기(傳記) 소설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내면 독백이란 점에서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지금껏 역사소설이 궁중소설과 민중소설로 나뉘어온 이분법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김훈의 니힐리즘은 삶의 조건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현실을 적극 비판하고 부정(否定)한다는 점에서 체념적 허무주의가 아니다'는 평도 나왔다. '칼의 노래' 프랑스어판을 낸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자도 "이 소설은 진짜 독창적"이라고 했다. "전쟁과 전투를 다룬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간 실존, 사랑과 죽음, 위엄과 자존심, 겸손에 대해 성찰한 작품이다."
'칼의 노래'가 그린 이순신은 충(忠)의 관념이 아니라 무(武)의 현실에 더 충실했다. 그는 무리하게 부하를 이끌고 적장의 목을 베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상징성'을 임금에게 바쳐 충성심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기에 탄핵받았다. 그는 다시 수군을 지휘하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가 적을 베면 벨수록 그를 시기한 임금의 칼에 자신이 베일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적과 아군 사이에 낀 무인(武人)의 아이러니였다. 그는 무인이기 때문에 임금의 칼에 죽기 싫어 전사하기를 바랐고 그것이 '나의 자연사'라고 믿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97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대표작은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해 수난의 역사를 다룬 것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인의 집단 기억엔 '바람 잘 날 없는 풀밭 풍경'이 굳세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 '풀'이 민중을 풍파에 시달리는 풀에 비유해 애송시가 된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칼의 노래'는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박힌 위기의식을 집단이 아닌 개인의 실존적 고독 속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 소설이 10년 넘게 널리 읽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생존의 고독이 과거보다 더 심화됐고 집단의 협력으로 극복하기 더 어려워진 현상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집단 윤리란 것도 이념 갈등에 사로잡힌 채 진영 논리에 그쳐 소모적인 정쟁(政爭)을 벌인 지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공직 사회는 직업윤리가 아닌 '집단 의리'에 빠져 부패하고 무능할 뿐 아니라 치부를 덮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무장(武將)의 윤리에 충실했던 이순신은 개인 윤리에 성실한 인간형이었다. 옛말에 "문신(文臣)이 돈을 밝히지 않고, 무신(武臣)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그런 개인 윤리를 실천해 궁극적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속한 국가는 무책임했고 무능해서 제 할 바를 다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0년이 지나서까지도 이순신의 '12척 정신'이 추앙받는 것은 역사의 비극인가, 희극인가. 그리고 과연 우리 사회에 배 12척이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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