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폐허 속에서 청년들은 게걸스럽게 책을 탐했다. 학교에서는 '껌 좀 씹는 부류'만큼이나 '책 좀 읽는 부류'가 힘을 썼다. 형의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을 읽으며 국가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지 배웠다. 이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을 만나는 일이고 세계의 심연을 보는 일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삼중당문고 세대'가 탄생했다. 1970년을 전후해 값싼 문고본 책이 쏟아졌다. 을유문고 서문문고 삼중당문고 등은 청소년도 쉽게 사서 볼 수 있었다. 1975년 100권 목록에 200원 균일가인 삼중당문고의 탄생은 블록버스터급 사건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150원이던 시절 밥 한 끼와 바꿀 수 있는 '교양의 도서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삼중당문고는 그 시절 청년들의 서재를 뜻하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 박숙자 지음)
'속물교양의 탄생'을 통해 근대 한국의 세계문학 열풍을 소개했던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가 돌아왔다. 이번엔 문고본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작법이 독특하다. 변사라도 된 듯 네 명의 소년·소녀를 만들어 내고 그들이 읽은 책 이야기를 시치미를 뚝 떼고 들려준다. 최인훈 '광장'의 준, 김승옥 '환상수첩'의 정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의 작가 혜린, 노동 현실을 알리기 자신의 몸을 던진 태일이라는 가상 인물의 목소리와 당대 문학이 그려낸 풍경을 교차시키는 이 논픽션은 소설처럼 맛깔나게 읽힌다.
꿀꿀이죽을 먹고, 쥐잡기가 남아 있던 시절의 한국은 모든 것이 궁핍했다. 책 또한 그랬다. 전후의 한국은 '미제'의 세상이었고 '해적판'의 세상이었다. 배고픈 소년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헌책을 읽었다. 일본 조일신문에 연재 중이던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단행본이 나오기도 전에 한국에서 먼저 책으로 나왔을 정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출판사들은 원고지 1매당 30원의 헐값에 공장을 돌리듯 일본 책을 번역해 팔았다. 저작권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한글을 읽고 싶은 열망은 잡지의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 학생들은 전국 단위 잡지 '학원'에 글을 싣고 '사상계'를 돌려가며 읽었다. 종이가 부족해 교과서를 찍기도 힘든 시절에 '학원'은 10만부를 찍었다. 순천고 김승옥, 춘천고 전상국, 보성고 조해일, 마산고 이제하, 경복고 황석영, 서울중 황동규, 서울중 마종기가 학원문학상을 받은 당대의 '문청'들이었다. 전국 남고생의 선호 직업으로 작가가 3위에 꼽혔다니 '학원'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소녀들의 독서 풍경은 조금 달랐다. '학원' 잡지를 읽으면서 '소공녀'와 '키다리 아저씨' '제인 에어'를 읽었다. 그들이 읽었던 '생의 한가운데'와 '데미안'은 여학생들에게 신화적 존재였던 전혜린이 번역해 남긴 유산이기도 했다. 두 개의 언어를 가진 번역가로서 전혜린은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작가였다.
1960년대는 게다가 '전집의 시대'였다. 을유문화사 동아출판 정음사 등이 앞다퉈 세계문학전집을 냈다. 500쪽이 넘는 호화 양장본을 독자들은 넋을 놓고 봤다. 월평균 소득이 6000원이던 시기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60권 가격은 2만5000원이었다. 거실 상석에 이 비싼 전집이 전시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책은 전태일이 읽고 싶어 했던 책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서울 쌍문동에 사는 22세 청년 전태일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하는 재단사였다. 하지만 책을 사려면 끼니를 굶어야 했기에 그 흔한 삼중당문고를 한 권도 갖지 못했고 짧은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저자는 역사란 읽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책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읽어낸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책을 덮으며 두 권의 책을 통해 각각 식민지 경성시대와 전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독서사를 다룬 저자가 쓴 그 이후 이야기를 기대하게 됐다. 믿고 읽을 만한 글쟁이의 탄생이다.
출처 : 매일경제 170325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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