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한 차례 지나간 뒤 눈부시게 피어났던 벚꽃들이 다 졌다. 늦되이 피는 산벚나무꽃만 산자락에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황사비 내린 뒤 대기는 씻긴 듯 맑고 청명하다. 거리의 은행나무 가지마다 새 잎이 돋고, 공중에는 석가탄신을 기념하는 연등들이 내걸린다. 그 연등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불현듯 이 봄도 다 끝났구나, 했다.
설레며 맞은 봄은 가고, 새로 오는 찬란한 봄은 한 해를 기다려야 한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지방 강연을 다니거나 원고를 쓰느라 책상에 코 박고 있는 사이 어머니의 두 번째 기일(忌日)이 지나고, 벚꽃 핀 길을 걷자는 약조도 지키지 못했는데, 봄날은 지나갔다.
봄날만 흘러가겠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간다. 파릇파릇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정수리께 검은머리가 흰머리로 바뀌고, 얼굴엔 없던 주름과 검버섯이 슬그머니 늘었다. 나만 혼자 늙는 게 아니니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한 시인이 노래하듯, 삶이란 흐르는 모래시계요, 아침 해에 걷히는 안개이고, 부산하지만 반복하는 꿈인가?
잘 보이던 눈이 침침해지고, 수면 시간이 부쩍 준다. 새벽에 깨어나 잠못 이루는 날도 더러 생긴다. 나이가 드니 혈당 수치와 간 수치가 올라가고, 백내장이니 퇴행성 관절염 따위가 빚쟁이가 달려들듯 몸에 달라붙어 괴롭힌다. 그렇게 닥쳐오는 노화와 쇠락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인생은 짧아 허무하고, 이루려던 꿈과 행복은 아득한 저 멀리 있다.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노년을 맞는다. 우리는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부터 경쟁이 치열했다. 사회에 나올 때 입사 경쟁도 전쟁 같았다. 첫 경쟁에서 실패하고, 그 뒤로도 많은 실패를 겪었다. 한데 인생 낙오자로 살면 어떤가, 하고 욕심을 비우니 그럭저럭 살 만했다.
첫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 뒤로 승승장구하며, 높은 직위까지 올라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친구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 하릴없이 주중 산행을 하거나 또래 친구들과 모여서 점심내기 당구를 치고 대낮에 소주잔을 나눈다. 벗의 늙음을 한탄하는 얘기를 듣고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헛헛해진다. 인생이란 본디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짧은 것인가.
오늘 아침 늙음에 대해 더 이상 서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는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이라고 말한다. 노화는 피할 수 없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 것은 가고, 가고 나면 새로이 돌아온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지구는 해마다 새로운 계절을 맞고, 새로운 꽃과 생명들로 채워진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이 지구를 물려주고 퇴장하겠지만, 지구는 생명 약동하는 별로 우주에 존재할 것이다.
노화도, 죽음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날마다 동이 트고 새벽마다 나뭇가지에 와서 노래하는 새들이 있다. 그 새들의 노랫소리는 얼마나 영롱한가. 아직 할 일이 있고, 팔다리는 쓸 만하다면 가진 게 없어도 인생은 살 만하다. 이제 곧 유성우 내리고 반딧불이가 파랗게 빛나는 여름밤이 오고, 태양은 하얀 불꽃처럼 타오르고 수밀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돌아오지 않는가!
자, 오늘은 오늘 할 일을 하자. 너무 힘들게 일만 하지는 말자. 평생 노동으로 군살이 박인 손은 쉬게 두자. 미덕이라고 하는 일들은 대개 하찮은 일이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미덕을 베풀어보자. 그리고 햇볕을 쬐며 걷고, 걷는 동안 신록의 계절을 만끽하자. "땀이 일의 모든 것이 아니다. 놀이하듯, 자신이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인 듯, 여유롭게 때로는 게을러 보일 만큼 느긋하게 살아볼 일이다."(소로) 느긋하게, 천천히 가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땅거죽을 뚫고 돋아나는 작약 움이라도 웅크려 바라보자.
나는 오늘 종일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을 들어보려고 한다. 가진 게 없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인 듯 살아볼 일이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진짜 부자다!
출처 : 매일경제 160423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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