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샘 ♣

풍요의 역설

달컴이 2016. 3. 26. 22:33

 

 

 

 

 

 

집은 먹고 자고 웃으며 생을 일구는 생명-공간이다. 갓난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며 재롱을 떨고 나날이 자라난다. 기둥에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키를 재고 표시한 눈금들이 남는다. 아이들이 훌쩍 커서 분가한 뒤 북적이고 소란스럽던 집은 고요해진다. 이 고요해진 집은 이제 노년기 부모의 안식처로 변한다.

집은 몸에 쌓인 피로를 풀고,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취하는 곳,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공간이다. 집은 안락하고 안전하며, 가족 구성원의 감정적 필요에 부응하는 장소여야 한다. 그래야만 집이 몸과 영혼을 재충전하는 구실을 다할 수 있다. 집은 활력과 영감이 넘치고 건강한 삶의 공간이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집의 중심은 가족이다. 물건들이 가족을 제치고 주인 노릇을 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그 많은 가구들과 물건들을 들이려면 집도 커야 한다.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 수억에서 수십억 원에 이르는데, 그런 고가(高價) 아파트를 사려고 은행에서 큰돈을 빌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를 소유하는 동시에 채무자로 전락한다. 그 돈을 다 갚으려면 어느 날 고액의 복권에 당첨되는 기적이 일어나거나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허리가 휘도록 일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돈을 벌어서 갚아야 한다. 왜 그토록 힘들고 삭막한 일에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야 하는가?

새들은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운다. 부지런함으로 소문난 벌들조차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고대의 현자, 디오게네스도 자신을 비우고 산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낡은 배낭, 옷 한 벌, 물에 적신 보리빵, 땅에 꽂을 막대기, 물컵. 그게 사는데 필요한 물건의 전부라고 여겼다.

어느 날 한 시골 아이가 옹달샘에서 두 손을 모아 물을 떠먹는 것을 본 뒤,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을 얻는다. "물을 떠먹을 두 손이 있는데, 진흙 컵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며 컵을 멀리 내던졌다. 우리는 왜 디오게네스처럼 살 수 없는가?

당신은 사는데 이러저러한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볼멘소리로 따진다. 맞다. 사람이 사는데 다양한 물건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꼼꼼하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집 안을 둘러보라. 쓰지 않은 물건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 장롱은 입지 않은 옷들로 가득하다. 쓰지도 않은 물건들을 집 안팎에 쌓아놓고, 입지도 않는 옷들을 장롱에 채우고 살 까닭이 무엇인가? 쓰지 않는 물건과 입지 않는 옷들은 다 우리가 이고 사는 짐들이다.

이제 생각을 바꾸자. 집을 꾸미는 데도 단순함의 원칙을 적용하자.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버려서 집 안에 더 많은 여백을 만들자. 여백이 많아지면 작은 물건도 그 존재감이 또렷해진다. 물건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는 귀한 물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소파, 탁자, 책 몇 권, 그것만으로 거실은 충분하다. 텅 빈 거실은 마치 공간이 숨을 쉬고 생기를 내뿜는 듯하다. 거실에 비친 한줄기 햇빛은 정갈함으로 빛난다. 당신은 온갖 잡동사니가 뒤엉킨 거실을 원하는가, 아니면 햇빛의 정갈함이 느껴지는 여백이 많은 거실을 원하는가?

지금 인류는 과거에 견줘 비할 바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지만 그 폐단과 부작용도 작지 않다. 우리는 넘치도록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고 너무 긴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느라 가족과 함께 보낼 더 많은 자유를 잃는다. 물건들이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에 기대려고 자연의 결을 거스르고, 조화와 균형에 이르는 마음을 놓친다. 더 많은 물건들을 갖고 풍요 속에 살다보니 오히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감각은 둔화하고, 이상하게 삶이 주는 만족감은 줄었다. 풍요의 역설이다.

더 작게 소유하라! 탈소유, 무소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자! 더 작은 집에서 살고, 더 작은 음식에 만족하며, 필요 없는 물건들은 누구에겐가 양도하자.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그건 필요 없는 물건이다. 언젠가 쓸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물건은 나중에도 별 쓸모가 없다. 당장 필요가 없다면 이웃에게 나눠주거나 과감하게 내다 버리자. 집 안이 잡동사니로 뒤엉켜 복잡하다면 인생도 따라서 복잡해진다. 단순하게 살자. 버리고 비우자. 단순한 삶에서 기쁨과 보람은 커지고, 자기 초월의 순간들은 더 자주 경험할 수 있다. 아울러 단순한 삶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을 때 분명 그토록 많은 것들이 필요할 리가 없다. 

                                                                                                                               출처 : 매일경제160326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