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정부 때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는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였다. 1947년부터 3년간 미국 정보장교로 서울에서 근무했고, 1950년대 말에는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1977년 그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대학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건강을 위해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그는 길가의 공원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까워져서 2년여 동안 친근한 말벗이 되었고, 서로의 개인사를 잘 모르는 채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노인이 보이지 않자 레이니는 그 집을 방문했고, 노인이 바로 전날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장례식장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노인이 다국적 기업 ‘코카콜라’의 창업자 로버트 우드러프 회장이었음을 알게 됐다.
한 사람이 그에게 노인의 유서를 전했다. 놀라운 유언이 거기 담겨 있었다.
“당신은 2년이 넘도록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며 나의 말벗이 되어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를 깎아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 25억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사양만 할 수 없었던 레이니는 무려 4조원에 달하는 그 거금을 모두 에모리대학의 발전기금으로 출연했으며, 그 자신도 이 대학의 총장을 지내면서 끝까지 헌신했다. 미국 대학 사상 역대 최고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에모리대학은 급성장해 남부의 명문이 되었다.
16년간 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대학의 대학원은 ‘레이니 대학원’으로 명명되었다. 총장직을 마친 1993년부터 4년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었고, 한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대사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반추하고 있는 레이니의 이 실화는 우리에게 삶의 도정을 걸어가면서 꼭 익혀야 할 몇 가지 가르침을 전해준다. 먼저 우드러프 회장에 관해서다. 그렇게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레이니라는 사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처럼 큰돈을 ‘친구’에게 남길 수 있었을 터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레이니의 행위다. 평소의 따뜻한 마음과 선한 행동으로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운 응답이 상상도 못한 선물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것은 결코 황금광 시대의 금맥도, 자본주의 시대의 일확천금도 아니다. 또 있다. 그와 같은 평소의 인품뿐만 아니라 그러한 거금을 뜻있고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돈을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우드러프 회장이 단순히 ‘친구’라는 인식만으로 레이니에게 전 재산을 남겼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레이니의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회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오는 것처럼 참된 행운은 스스로 예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행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온다.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소식이지만 대책 없이 큰 복권에 당첨되었다가 마침내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준다. 행운과 축복을 기다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꿈이다. 하지만 평소의 ‘마음가짐’을 통해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가난한 무명 시절 교회 창고에 살면서 생쥐를 벗 삼아 미키마우스를 발굴한 월트 디즈니, 온갖 실패와 좌절을 딛고 상상의 세계 가운데서 해리 포터를 탄생시킨 조앤 롤링은 모두 현실의 어려움을 미래의 소망으로 가꾸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이제 송년의 계절이다. 해가 가기 전에 우리에게 무슨 행운이 없을까 하고 기대한다면 그에 앞서 평상시에 받을 그릇부터 먼저 준비해야 옳겠다.
출처 : 매일경제 141205 [김종회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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