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때에는 제게 별다른 관심도 없는 상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회식 1차가 끝나고 2차로 맥주를 한 잔 하러 나면 꼭 제 옆에 앉아서는, 예를 들어 이런 말을 합니다. “L씨, 내가 이런 얘기한다고 고깝게 듣지 말았으면 해. 인생 선배로서 충고 한 마디 해도 될까?” 그런 말에 “싫은데요”라고 딱 잘라버릴 배짱이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라고 마지못해 싹싹하게 대답하지요. 그러면 “L씨는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아. 입이 가벼워서 쓰겠어? 그거 고쳐야 해”라고 시작합니다. 열 확 받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냥 웃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상사, 한참을 떠들고 나서는 자리를 옮기더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 붙잡고 예의 그 ‘인생 선배로서 충고 한 마디’를 시작하네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과천에서 L )
누구든 자기 방식으로 남을 뜯어고치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사회에서 만난 공적 관계라는 건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때는 말을 하지 못하다 회식 자리가 마련되면 발동이 걸립니다. 한국 사회에서 회식은 공적인 관계와 사적인 관계를 일시적으로 흐릿하게 만들면서 조직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구성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 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술 한 잔 들어가고 나면 평소의 억제능력이 사라지며 이런 일방적 개입이 시작하게 되는 됩니다. 마치 집에서 아빠,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듯이,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적인 관계가 재연되는 것 같습니다. 직장 상사 분이 갖는 심리는 바로 공적 관계 속의 ‘공권력’으로 남의 개인사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그런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경험적으로 상대방이 그런 말을 하면 싫어할 것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자기도 듣는 쪽 처지가 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앞머리에 “고깝게 들지 말고…” “동생 같아 하는 말인데…” 등 기술적인 ‘전 처치’를 해두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말을 잘라 버리긴 어렵지요. 머뭇거리는 순간, 상사에게는 평소 007만 갖고 다닌다는 살인면허 비슷한 면죄부가 발부됩니다. 이제 그가 마음대로 당신을 재단해서는 충고랍시고 이 말 저 말 퍼부어대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는 고행의 시간이 이어집니다. 이때 표정관리라도 제대로 못하면, 바로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야” “넌 그래서 안 돼”라는 식의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이 상사는 나름대로 종교적 수준의 의무감을 갖고 있답니다. 길 잃은 어린양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책임감 말입니다. 정작 길 가던 양은 길을 물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 지혜의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리은어 (0) | 2007.05.28 |
---|---|
대검찰청 터 (0) | 2007.05.10 |
[조용헌 살롱] ‘살롱 話法’ (0) | 2007.04.19 |
유정란의 생명력 (0) | 2007.04.12 |
입사전쟁 승패 가르는 ‘2분’ (0) | 2007.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