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도 포구에서
철부지(不知)’는 ‘철을 모른다’는 말이다. ‘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철마다 피는 꽃이 어떤 꽃인가를 아는 일이고, 그 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요즘은 들판에 심어 놓은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철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면 생각나는 음식이 섬진강에서 나오는 ‘보리은어’이다.
은어 중에서는 보리 익어 갈 때 나오는 보리은어를 최고로 친다. 왜냐하면 보리은어는 비린내가 나지 않고 수박향이 나기 때문이다. 강에서 잡히는 고기는 당연히 비린내가 나야지 어떻게 수박향이 난단 말인가. 이때 잡히는 보리은어는 섬진강 강바닥의 수많은 돌에 붙어 있는 이끼를 뜯어먹고 자란 은어이다. 돌에 붙은 초록색의 물이끼를 먹고 자라니까 식물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다. 수박향은 초록색의 이끼가 은어 뱃속으로 들어가서 화학변화를 거친 냄새인 것이다. 이 보리은어의 수박향이 섬진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5월의 냄새였다. 보리은어의 크기는 10cm 내외이다. 바로 잡아서 통째로 비늘을 벗기거나, 내장을 들어낼 필요도 없다. 그대로 초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보리은어는 임금님에게 올리는 진상품에 들어갔다고 한다. 살짝 불에 그슬려 말린 다음에, 새끼줄로 꾸러미를 만든다. 이 은어 꾸러미를 서울로 가지고 올라갔던 것이다.
은어는 여름이 지나서 잡히는 것은 생으로 먹을 수 없다.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여름이 지나면 비린내가 나고 뼈가 굵어지게 된다. 섬진강은 ‘정관수술’을 하지 않은 강이다. 섬진강에는 하굿둑이 없다는 말이다. 낙동강, 영산강, 금강은 하굿둑이 막혀 있다. 하굿둑이 막혀 있으면 바닷물이 강으로 들락거리지를 못한다. 바닷물이 들락거려야 살아 있는 강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할 때 다양한 고기들이 서식한다. 둑을 막아 놓으면 남자에게 정관수술을 한 것과 같아서 생명의 씨를 뿌리지 못한다. 섬진강은 하굿둑이 없기 때문에 고기들이 많이 올라온다. 1월에는 배지느러미가 주홍빛을 띠는 누치가 올라오고, 2~3월 매화가 필 때에는 남해에서 황어가 올라온다. ‘철부지’ 인생이라 황어는 놓쳤지만 보리은어는 놓치고 싶지 않다.
-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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