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동안 ♣

반도체 소재도 신종플루 치료제도…`빛의 공장` 덕에 빛 봤다

달컴이 2020. 5. 3. 22:37





최근 정부의 `대형 가속기 장기 로드맵`이 국가과학기술심의회를 통과하면서 차세대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인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강원 춘천, 경북 포항, 충북 청주, 전남 나주 등 4개 지자체가 치열한 유치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오는 7일 용지 선정을 완료하고 이달 중 사업 예비타당성조사를 신청할 계획이다.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구축안이 연내 예타를 통과해 실제 건설에 들어가면 가속기는 2022~2027년 총 6년간의 설계·건설 기간을 거쳐 2028년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다. 향후 한국이 세계 최고 성능의 새로운 방사광가속기를 갖추게 되면 기초과학은 물론 신약 개발, 소재·부품 개발 등 산업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방사광가속기는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킨 전자가 자기장 속을 지날 때 나오는 빛(방사광)을 이용해 각종 물질을 분석하는 첨단 연구장비다. 적외선부터 가시광선, 자외선, X선에 이르는 다양한 파장의 빛을 만들어낼 수 있어 `빛의 공장`으로도 불린다. 연구자는 분석 대상에 따라 원하는 파장의 빛을 선택해 각종 실험을 할 수 있다. 특히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가 생성하는 빛은 밝기가 태양빛의 1000억배에 달해 원자로 이뤄진 수백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수준의 미세 구조까지 밝고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같은 특성 덕분에 방사광가속기는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백신·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3월 중국 서호고등연구원(WIAS) 연구진은 `상하이방사광가속기(SSRF)`로 코로나19 바이러스(SARS-CoV-2)가 인체 세포에 침투할 때 사용하는 스파이크 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바이러스가 어떻게 변형됐고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의 호흡기 세포와 결합하는지 규명한 것으로, 이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2009년 유행했던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는 미국의 `스탠퍼드 방사광가속기(SSRL)`를 이용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단백질 구조를 분석한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도 방사광가속기의 도움으로 개발된 것이다. 미국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BNL)의 `국립방사광가속기(NSLS-Ⅱ)`와 영국의 `다이아몬드 방사광가속기(DLS)` 등에서도 현재 코로나19 관련 실험을 진행 중이다.

방사광가속기로 얻는 연구 성과는 산업 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으로 지정해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계에 타격을 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가 대표적이다. 감광액인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필수 소재다. 일본은 방사광가속기로 생성한 EUV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포토레지스트 품질을 높여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을 확보했다. 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일본의 수출 규제 사태로 새로운 방사광가속기 도입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방사광가속기는 자동차 배기가스 저감 촉매 개발, 지진 연구, 우주 미세먼지 분석, 원자 분광학 등에도 활용될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포항가속기연구소에 `3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PLS-Ⅱ)`와 `4세대 선형 X선 방사광가속기(PAL-XFEL)`가 있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방사광가속기의 수요 대비 지원(공급)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지난해 74%에 그쳤다. 특히 기업들은 전체 수요 시간의 절반에 못 미치는 47.6%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PLS-Ⅱ는 1994년 도입돼 2011년 한 차례 업그레이드를 했지만 해외 장비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고, PAL-XFEL은 0.1㎚ 단일 파장의 고에너지 X선 레이저만 생성할 수 있어 활용 분야가 제한적인 점도 한계다. 고인수 포항가속기연구소장은 "PAL-XFEL은 같은 4세대이긴 하지만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와는 구조와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며 "PAL-XFEL은 움직이는 세포나 원자 등의 `스냅샷`을 찍는 데 유리하고,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는 물질의 미세 구조를 자세히 관찰하는 데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또 PAL-XFEL은 설치된 빔라인(실험실)이 3개밖에 되지 않아 동시에 여러 개의 실험을 진행할 수 없다.

새롭게 구축하게 될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으로 기획됐다. 빛의 세기를 결정하는 빔 에너지는 기존 3세대(PLS-Ⅱ) 3GeV(기가전자볼트)에서 4GeV로 높아지고, 이에 따라 빛의 밝기는 3세대보다 100배 밝아진다. 햇빛의 1000억배에 해당하는 밝기다. 빛의 집속도(크기)를 의미하는 빔 에미턴스도 5.8㎚·㎭(3세대)에서 0.1㎚·㎭ 이하로 대폭 줄여 손실되는 빛의 양을 확 줄였다. 현존하는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중 최고 성능으로 평가되는 스웨덴의 3GeV급 `맥스Ⅳ`(1.28㎚·㎭)보다 효율이 10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고 소장은 "3세대에서는 빛의 집속도가 낮아 손실되는 빛이 많았지만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에서는 생성되는 빛의 대부분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3세대는 연구용 연X선까지만 생성 가능했던 반면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는 의료·산업용 경X선까지 만들 수 있다.

동시에 운용 가능한 실험실 수를 의미하는 빔라인도 늘어난다. 3세대에는 현재 35개의 빔라인이 운용되고 있지만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에는 40개의 빔라인이 순차적으로 설치될 예정이다. 빔라인은 최대 60개까지 늘릴 수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초기에는 우선 빔라인 10개를 설치해 30%는 산업계 지원을 위한 기업용, 70%는 과학 연구용으로 운용하고 추후 수요를 반영해 빔라인을 늘려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 예산은 1조원대에 달한다. 국비는 8000억원 내외로 투입되고, 지자체는 약 2000억원 상당의 토지(26만㎡)를 제공할 예정이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에 따르면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로 거둘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생산 유발 6조7000억원, 부가 가치 창출 2조4000억원 등 총 9조1000억원과 고용 창출 13만7000명으로 전망되고 있다.

과학계 전문가들은 최근 지자체 간 차세대 방사광가속기 유치전이 과열 양상을 빚는 것과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한 과기계 인사는 "방사광가속기는 어디까지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첨단 과학 연구장비인데 일부 지자체에서는 과학기술보다 지역 균형 발전을 앞세워 정치를 하고 있다"며 "가속기는 본연의 목적에 맞게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지 않고 산업계·학계 연구자들을 잘 지원할 수 있도록 지반이 안정적이며 접근성이 좋은 곳에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성능 가속기는 기초과학 실력"…각국 자존심 걸고 시설구축 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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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와 산업계가 대형 가속기를 이용해 다양한 과학기술 성과와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거두면서 세계 각국이 이전보다 더 크고 우수한 성능의 가속기를 구축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2028년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는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스웨덴과 브라질, 유럽연합(EU)뿐이다. 스웨덴 룬드의 `스칸디나비아 과학마을`에 위치한 `맥스Ⅳ`는 둘레가 528m, 빔 에너지가 3GeV(기가전자볼트)인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로 2016년 새롭게 도입됐다. 2018년 브라질 상파울루에 완공된 `시리우스`는 둘레가 518.4m로 역시 3GeV급이다. 올해 하반기 본격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EU는 프랑스 그르노블에 위치한 3세대 `유럽방사광가속기(ESRF)`를 지난해 말 4세대로 업그레이드해 현재 시운전 중이다.

구축 단계에 있는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들도 있다. 중국은 베이징에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둘레 1.2㎞의 6GeV급 `고에너지방사광가속기(HEPS)`를 건설 중이다. HEPS를 중심으로 100㎢에 달하는 거대 과학타운을 조성한다. 일본은 둘레 354m의 3GeV급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 `SLiT-J`의 신규 건설을 추진 중이다. 그 밖에 미국과 일본, 영국, 독일에서도 기존의 다른 가속기 시설을 개조해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를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국의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는 둘레 800m, 빔에너지 4GeV로 계획됐다. 빔에너지가 클수록 더 밝은 빛을 만들 수 있지만 너무 크면 상대적으로 빛을 모으기가 어려워 효율이 떨어지고 낮은 에너지 영역대의 관측 정밀도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일본은 3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인 이화학연구소(RIKEN)의 `스프링-8`을 4세대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빔에너지를 8GeV에서 6GeV로 낮추기로 했다. 또 빔에너지를 높이려면 가속기 크기도 더 커져야 하기 때문에 새로 건설할 경우 비용과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된다.
2016년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4세대 선형 X선 방사광가속기(PAL-XFEL)`를 완공한 바 있다. 방사광가속기 외에도 양성자가속기, 중이온가속기, 중입자가속기 등 고성능 대형 가속기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경북 경주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양성자가속기 성능을 기존 100MeV급에서 200MeV급으로 높이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200MeV(우라늄 기준)급 중이온가속기는 내년 말, 430MeV(탄소 핵 기준)급 중입자가속기는 2023년 각각 대전과 부산에 각각 완공될 예정이다.
                                                            출처 : 매일경제 '200502 송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