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샘 ♣

전국 최고령, 1928년생 현역 아르바이트생 임갑지 맥도날드 미아점 크루

달컴이 2019. 2. 10. 14:58







"90대 아르바이트생도 청년들과 똑같이 땀을 흘리죠.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생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된 일이지요."
전국 420개 맥도날드 매장 중에서도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미아점`에는 `특별함`이 있다. 올해 91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청년들과 똑같이 제 몫을 해내는 전국 `최고령` 아르바이트생 임갑지 크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나이만 많다고 그를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이곳 젊은 직원들이 전하는 임 크루의 진짜 가치는 `성실함`이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미아점 한 곳에서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이나 무단결근을 하지 않았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 양주시 자택에서 20㎞ 거리인 미아점을 16년 동안 다녔다. 먼 출근길과 쉴 틈 없는 매장 정리 업무로 손에 쥐는 수십만 원을 그는 손주 용돈과 불우이웃 돕기에 아낌없이 쓴다. 처음에는 건강에 안 좋다며 아르바이트를 만류했던 자녀들도 이제 임 크루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라고 응원한다. 미아점 젊은 크루들에게도 그는 인생의 `나침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거대한 취업장벽을 넘어야 하는 손주 같은 직원들에게 늘 "(아르바이트라는) 작은 시간에 충실하면 더 큰 시간을 만나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91세가 돼서도 실천하는 어른이기에, 젊은 크루들은 그의 덕담을 가볍게 흘려 듣지 않는다.
"지금 일하는 미아점은 청년 시절 제가 한국전쟁에서 싸웠던 미아리고개 전투 현장이기도 하죠. 70여 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이곳에 있는 걸 보면 미아리와 무슨 `운명`이 있나 봐요."
인생 황혼기를 활력 가득한 `아르바이트 도전기`로 채우고 있는 임 크루는 "백 살이 돼서도 미아점으로 출근하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아흔 넘은 어르신 아르바이트생이 실제 존재할까 궁금했다. 이렇게 직접 보니 너무 정정하시다.
▷가끔씩 언론에서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최고령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하던데, 이게 다 1928년에 태어난 덕분인가(웃음). 하지만 나이 많고 적음이 지금의 내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건강이 더 좋아지는 면도 있다. 일을 시작하니 오히려 지치지 않고 잔병도 없어지는 것 같다. 그 덕분에 "어쩜 이렇게 건강하시냐"며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뛰고 싶다고 소개해 달라는 지인이 많아지고 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자녀들 반대가 상당했을 텐데.
▷돈 때문만은 아니다. 내 평생을 돌아보면 넉넉한 삶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돈을 빌리러 간 적도 없는 삶이다. 슬하에 3남매가 있는데 맏이를 세 살 때 잃고 지금은 장성한 둘째 딸과 셋째 아들이 제 몫을 다해주고 있으니 잘된 것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뭔가 허전하고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2003년 일거리를 찾다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물론 자식들은 건강에 무리가 될 수 있다며 극구 말렸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걱정이었는데 자식들에게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이게 운동도 되고 정신적으로도 좋다"고 설득했다. 또 "내가 쉬면 너희들에게 용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기생충 같은 삶이 아니냐. 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니 아이들도 더 이상 반대를 못하더라.


―공공기관에서 주선하는 어르신 일자리도 있을 텐데 굳이 패스트푸드점을 선택한 이유는.
▷2003년 일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 서울시 취업박람회장에 가봤다. 그곳에 가니 예식장 주례 아르바이트부터 정말 많은 일자리가 있더라. 그런데 우연찮게 현장에서 본 맥도날드 로고가 마음에 들었다. 55세 이상 시니어 크루를 뽑는다고 해서 현장에서 지원서를 썼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지원서를 정성껏 쓰고 담당자에게 "이 종이 한 장에 내 인생 모두를 담았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어도 말단에서부터 장사를 한 경험이 있다"며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진짜 연락이 오더라. (서류 통과 후) 면접과 실습교육을 마치고 미아점에서 일을 시작한 게 벌써 16년 됐다.(맥도날드는 글로벌 차원에서 55세 이상 시니어 크루를 적극 채용하고 있다. 이들이 겪은 풍부한 사회 경험과 성실한 근무 태도가 업무 효율성은 물론 다른 젊은 크루들에게도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임씨를 포함해 전국 맥도날드 매장에는 시니어 크루 3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매장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매주 일요일과 수·목·금요일에 출근해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일한다. 한마디로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이다. 미리 도착해 테이블을 비롯해 주변 정리를 한다. 컵과 트레이를 세척하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것도 내 일이다. 식기 하나도 내 부모에게 드리는 것처럼 깨끗하게 씻고 있다.(매장 직원들은 임 크루가 짬이 날 때는 매장 밖 전철역 주변에 있는 담배꽁초와 쓰레기도 말끔하게 청소해주는 `해결사`라고 귀띔했다.)

―16년 동안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을 하지 않았다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비록 아르바이트생 신분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매니저`처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 출근길이 쉬운 것도 아니다. 양주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데 아침 7시 48분께 양주역에서 급행을 타면 8시 30분쯤 매장에 도착한다.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업무는 나 혼자가 아니라 크루 간 협업이 중요하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유로 갑자기 업무를 변경하거나 지각하면 다른 크루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이런 생각으로 출근했을 뿐이다.


―이렇게 고생해서 한 달에 얼마를 버나.
▷대략 60만원 정도인데 누군가에게는 이게 적은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주변 지인들과 비교할 때 그리 적은 돈이 아니다. 시청이나 군청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보면 한 달에 20만원이다. 월급은 꼬박 저축해 목돈이 되면 손주 용돈을 주고 지역 봉사단체 기부 등에 쓴다. 몇 년 전에 100만원을 모아 대학에 들어가는 손주에게 줬는데 며느리가 목이 메어 이렇게 말하더라. "나이 아흔이 돼서도 이렇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손주에게 주는 시아버지는 세상에 우리 아버님 한 분밖에 없을 것"이라고. 교회 헌금과 봉사단체 회비를 내고 남는 돈은 아내가 여기저기 다닐 수 있도록 교통카드를 충전하는 데 쓴다. 크게 쓸 돈은 아니지만 나름 의미 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족 누군가가 생일을 맞을 때 내가 번 돈으로 작은 케이크라도 하나 살 수 있으면 성공한 삶 아닌가.

―그래도 매번 먼 거리를 출퇴근하는 부담이 클 것 같다.
▷정반대다.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내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니 몸이 더 건강해지고 있다. 열심히 움직인 덕에 이 나이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는데 심장과 심혈관 나이가 65세로 나왔다.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성인병이 일절 없어서 의사도 깜짝 놀라더다. 16년 동안 무단결근이나 지각을 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비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아르바이트와 더불어 별도로 음식 관리를 하는지. 콜라와 햄버거도 먹나.
▷음식 관리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아내가 `도시락`을 챙겨준다. 다른 크루들은 매장에서 햄버거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데 나는 닭고기 알레르기가 있다. 그래서 매번 출근할 때마다 아내가 배추김치와 마늘장아찌 등 채식 위주로 도시락을 챙겨준다. 사실 내 아내도 잠깐 미아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아내도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니는 성격이라 그런지 건강검진에서 나처럼 아무런 지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과 채식 위주 식단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콜라는 잘 마신다.(웃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는데 유년기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지금 북한 순흥비행장과 가까운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압록강 만포선 철도 개설 공사 등 여러 철도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신 탓에 이사를 많이 다녔다. 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가려고 하는데 집안 형편이 안 돼 내가 학자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 마쓰시타전기 주식회사에 취업해 학비를 벌어오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곧 불바다가 될 것이다. 말이 취업이지 군대에 끌려가게 될 것"이라며 만류하셨다. 그때 아버지 말을 안 들었으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페이지가 바로 한국전쟁일 텐데, 당시 군인으로 복무했나.
▷해주에서 남하해 인천 옹진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49년 자원 입대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옹진군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전쟁 발발 한 달 전인 1950년 5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일등병으로 옹진 전투사령부 야전병으로 근무하면서 매일 부상자를 실어 날랐다. 부대에서도 주민들을 후방으로 소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던 참이었다. 5월 10일인가, 아버지께서 모를 내려고 논에 물길을 만들고 계시기에 "지금 모 낼 때가 아니다. 얼른 필요한 것만 챙겨서 가족과 피란 가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보름 후인 25일 어마어마한 북한군 탱크들이 넘어왔다.

―당시 수도 서울 방어가 급선무였을 텐데 실제 현장 상황은 어땠나.
▷내 인생에 `미아리`가 운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중인 매장 내에서 손가락으로 큰 길가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가 전투 현장이었다.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 30분, 18연대에 `미아리고개에서 북한 탱크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돈암동·창동에 탱크가 진입했는데 미아리고개에 잠복했다가 탱크를 저지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무기가 있겠나. 비 오듯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탱크에 접근해 해치를 열고 화염병을 던져 저지하는 방식이다. 이론으로만 가능한 작전일 텐데 놀랍게도 부대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어 작전에 자원하더라. 당시 의무대 약제과 소속이었던 나는 부상병 치료에 필요한 약품을 확보하느라 창경궁부터 삼각지까지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결국 미아리고개 작전이 실패하고 이튿날 서울 하늘에 굉음이 들렸다.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다.

―참혹했던 전쟁에서 천운으로 살아남은 셈인데.
▷죽을 고비가 왜 없었겠나. 한번은 전투가 끝나고 보니 군복 대퇴부 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더라. 북한군 총알이 옷만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때 우리 군복이 미군 복장이었는데 체형에 맞지 않아 헐렁했다. 그 구멍을 본 상사가 "넌 앞으로도 안 죽겠다. 기관포가 바지만 뚫고 간 사람이니"라고 하더라. 당시 우리에게 생존 수칙은 `펑`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엎드리는 것이었다. `펑` 소리가 들릴 정도면 북한 포탄이 멀리서 오는 것이라 엎드리면 살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근접 발사된 포탄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바로 죽는다는 의미다. 종전을 맞고 3년 더 복무하다 제대할 수 있었다. 그때 내 최종 계급이 특임상사였는데 총 5번 특진했다. 의무대 위생병으로 복무하면서 이같이 특진한 사람은 당시 나밖에 없다고 들었다.

―`도시락 내조`를 해주시는 부인은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
▷제대하고 결혼하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취업이 쉽게 안 됐다. 취업에 필요한 졸업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옹진군이 수복 지역이라 증명서 발급이 제대로 안 됐다. 지인들 도움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늦깎이로 45세에 농협에 들어갔다. 아내(최정례 여사·80)와는 농협에 들어가기 전인 1962년에 만났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중매를 서주셨는데 나보다 열한 살이나 어렸다. 그 당시에도 상당한 차이인데 다행히 내가 부인을 잘 설득해서 결혼에 성공한 것 같다.


―열한 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부인께 설득하신 건가.
▷지금도 아내가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얘기한다. 중매 자리에서 부인에게 "열한 살에서 10년을 뺀 나이가 당신과 나의 `진짜 나이 차`가 될 것이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을 것임을 내 몸으로 평생 입증해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당시에는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얘기냐"고 생각했겠지만 실제 내가 건강하게 살면서 이걸 입증하며 살아왔으니 약속을 지킨 것 아닌가. 또 하나, 아내에게 늘 존대하겠다고 했다. 90세가 넘어서도 아직까지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쓴다. 나이 차가 어떻든 부부간에는 반드시 서로 예를 지키며 사는 게 맞는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57년을 살면서 부인과 싸운 적은 없었나.
▷다툼이 있으면 내가 먼저 양보한다. 서로 베푸는 마음만 가지면 사실 싸울 일도 없다. 내 아내는 나보다 더 원칙을 중요시한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승복을 안 하는 성격이다. 내가 똑같이 승복 안 하고 버티면 결국 서로 부러질 수밖에 없다.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가 있다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부부간에 충돌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충돌이 생기면 오래 끌지 말고 잠시라도 `쉬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이 작은 실천으로도 부부 관계는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알바가 끝나고 봉사활동을 다닌다고 들었다.
▷지역 봉사단체인 양주시 로터리클럽 창립 멤버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1982년에 생겼으니 벌써 37년 됐다. 그때 49명으로 시작했는데 많은 분이 돌아가시고 이제 현역 창립 멤버는 나를 포함해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소아마비 단체도 지원하고, 참여하는 보람이 크다. 로터리클럽은 직업을 가진 이들만 가입할 수 있는데, 지금 내가 일하고 있다는 소중함도 깨닫을 수 있어 좋다. 언론에 간간이 최고령 알바생으로 소개되면서 전국 클럽 회원들이 나를 알아봐준다. 일하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거다. 단돈 1만원이라도 내가 땀을 흘려 번 돈으로 누구를 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사람이든 단체든 수십 년을 함께하는 삶이 인상적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 다니는 청량리교회는 1962년부터 57년 동안 다니고 있다. 사실 첫 아들이 세 살 때 발작으로 죽고 나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때 우리 부부가 신앙의 힘으로 더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까지 왔다. 매일경제와 인터뷰하게 됐으니 말하는 건데, 신문도 50년 이상 구독하고 있다. 밥을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매일 신문을 읽는다.

―안타깝게도 지금 청년들은 취업난으로 일자리와 첫 인연을 맺는 것부터 쉽지가 않다.
▷왜 안 그렇겠나. 여기 매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늘 당부하는 말이 있다. 현재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꼭 더 높은 위치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바라고 제대로 안 하면 다음 단계에서도 성과를 낼 수 없다. 시급을 받는 알바가 아니라 매니저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책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살면서 군생활도 하고 일반 직장, 개인 사업도 했지만 어느 부문에서든 인정받은 편이다. 적당주의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모든 일을 나에게 한 약속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많은 지혜를 군에 복무하면서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어렵게 직장을 얻었지만 다양한 이유로 의욕과 만족감을 잃는 사례도 많다.
▷하고 싶은 일만 찾으면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만나기가 더 어려워진다. 창창했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만족감도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와 미래보다 현재의 시간에 충실한 게 정말 중요하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있다.

―2019년 새해 소망이나 준비하는 계획이 있다면.
▷(웃으며)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새해라고 큰 계획이 있지는 않다. 오로지 가정 모두가 건강하고 나 역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여기에서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0세까지 알바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게 가장 큰 바람은 이런 내 생각들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 임갑지 크루는…
1928년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태어났다. 철도공사 인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해 황해도 해주에서 소학교를, 인천 옹진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일본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일본 가면 모두 군에 끌려간다"며 아버지가 만류해 포기하고 스물한 살이던 1949년 군에 입대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해 당시 18보병연대(백골부대) 소속 의무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이등병에서 총 5계급 특진해 특임상사를 끝으로 제대했다. 농협에 입사해 55세에 정년퇴임한 뒤 축산업을 하다가 2003년부터 지금까지 맥도날드 미아점에서 최고령 크루로 일하고 있다.
                                                                                                                         < 매일경제 이재철 기자>